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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이성룡 '비자나무 숲에서'

이성룡 '비자나무 숲에서'
'여전사 와파 비스'

  현실고발 사상, 자연주의 시인 이성룡은 혼돈의 시대와 상처받은 한 영혼의 기록으로 <비자나무 숲에서>를 시집으로 펴냈다. 그는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의 미로 때로는 너무나 쉽고 평이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길이 정겨울 때가 있다. 존재의 바닥에서 부터 현재의 삶의 지점에 이르기까지 인간으로 겪는 수많은 체험을 가슴으로 우러나는 시어로 표현했다.

  마을이 낮잠을 깨는가 싶더니
  산그늘이 등을 떠민다
  그리운 저녁연기도 없는,
  맛난 냄새도 새어나오지 않는 골목으로
  여운이 길게 흩어지고 있다
   -여름 풍경화 중에서-

  한폭의 수채화를 그린 듯, 우리를 그리운 고향으로 이끌고 있다. 시는 한권의 소설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여전사 와파 비스'
  멀리서 총을 겨눈 이스라엘 군인들이
  배추벌레처럼 애처로운 한 여인을 에워싸고
  스피커가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다
  흰 배에 검붉은 화상 흔적이 드러나는 순간
  여전사 와파 알 비스는
  바지 속에 감춘 줄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이승과 저승을 잇는 폭탄 기폭장치는
  두 번이나 거룩한 뜻을 외면했다
  스물한 살의 가냘픈 처녀는 울었다
  무엇이 서러워 우는지
  군인들도 증거 테잎을 본 사람들도
  스물한 살 식민지 처녀의 내면을
  정확하게 읽을 수 없었다
  상냥한 얼굴로 편의점에서 일을 하거나
  교정의 나무 그늘에서 시를 감상하고
  남자친구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면 좋을
  그 아리따운 처녀는
  죽어 조국의 원수를 응징하고자 했으나
  영웅이 되지 못했을 뿐이다
  다만 실패로 건진 것은
  강철처럼 단련된 전사의 육신이거나
  훗날, 그 어느 평화로운 날에 쓰일,
  청춘이 강금된 목숨이었으니

  우리의 논개, 유관순열사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요즘 사람들은 의식이 없다. 일황에게 도시락 폭탄을 던진 이봉창 선생이 생각나는 것은 우연이 아닐진데.

  이성룡 시인은 소통이 가능한 시어를 선택함으써 자칫 어렵게 느켜질 수도 있는 소재를 쉽게 풀어나갔다. 그는 인간의 삶에 대한 존재에 대한 성찰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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