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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상 '날개'

이상 '날개'

  중학교 때 1번, 대학시절에 1번, 그리고 오늘 3번 째 읽는 이상의 <날개>는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깊고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기에 단순하게 읽다 보면 외설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현실 비판과 남자의 무능력이 가져오는 사회 모순이 독자로 하여금 비탄에 잠기게 한다.

  경제력을 잃고 그 어떠한 것도 할 수 없는 남자의 비극인지, 어떠한 이유로 생각의 덫에 갖혔는지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상의 <날개>는 자유연상, 자동기술, 내적 독백 등의 실험적 구성과 문체로 식민지의 근원을 파헤치려고 노력했다. 바람불고 어둑한 밤비를 맞으며 경성역 (서울역)을 배회하다 들어오곤 했던 주인공은 무엇을 찾아서 무엇을 기다리느라 경성역에서 방황하고 있었을까? 을씨년스런 날에 비를 맞고 몸살에 걸려 오랫동안 이불 속에서 살아야 했던 그는 아내가 준 약(감기약이 아니라 수면제)을 발견하고 삶의 회의를 느낀다. 아내의 방에서 손님과 함께 모종의 일을 하고 돈을 받던 아내로 부터 받은 돈을 모아 아내에게 준다. (주인공도 아내와 함께 뭔가를 할 의도로). 내용 자체를 보면 가엾은 주인공이며 하늘을 보고 한탄해야 할 입장이지만 한 소리도 하지 못하는 팔푼이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주인공은 나라를 잃은 백성들의 표상이고, 경성역을 해매는 것은 대한민국의 심장이 경성역이다. 경성역을 통해 광복이 찾아 오지 않을까 하는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내면의 깊은 반항심이 이는 주인공이지만 아내 앞에만 가면 말을 하지 못하는 반병신이 된다. 나라를 잃은 백성은 백성으로서 권리도 잃고 항의할 수 있는 힘도 없다. 아내의 상징은 일제를 뜻한다. 아내가 차려주는 데로 밥을 먹고 용돈을 준다. 일제가 하라는데로 따라 해야하는 것은 당시 조선의 백성들이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덕이다. 아내에게 찾아오는 남자들은 외국과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을 뜻한다. 아내가 처방하는 수면제는 일본이 우리나라,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가하는 압력이다. 나라를 잃은 우리는 무기력할 수 밖에 없다.

  일제강점기의 우리들의 삶은 어떠한가. 조정래의 <아리랑>을 10번 을 넘게 읽고 있다. 그러한 처절한 삶을 살며 지켜낸 우리나라는 그 때의 일을 겪지 않았으니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40년 이상 그들이 우리에게 가했던 잔악함으로 무기력(날개의 주인공처럼)해서 희망이 없이 살았던 그 정신이 모두 죽었나보다. 일본이 좋다고 일본으로 여행하고 (물론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일본을 알기 위해 여행하는 것은 좋다 - 대학 시절에 민주주의를 위해 함께 통곡하고 울분을 토하며 일본을 우리의 주적이라고 외치곤 했던 친구조차도 일본에 여행가서 좋아 죽는다) 일본제품에 환장하고 바닥을 쳤던 아사히맥주에 미쳐 날 뛰는 사람들을 볼 때면 지하에 계신 선조들이 벌떡 일어날 일이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우리는 또 다시 <날개>의 주인공처럼 서울역에서 비를 맞으며 방황하며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날개는 자유 즉, 독립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