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모토 바나나 '아르헨티나 할머니'
요시모토 바나나
'아르헨티나 할머니'
역자 김난주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을 더 이상 읽지 않겠다는 생각은 역자 김남주에 의해 무너졌다. 소설 작품을 번역할 때 작가 이상의 문학적 교양, 지식, 언어 감각이 뒷바침 되어야 가능한데, 김난주가 그렇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석공인 아빠는 근처의 건물(아르헨티나 건물이라고 아이들이 부름)에 사는 아르헨티나 할머니(본명은 나리 - 아르헨티나 춤을 가르치기도 하고 아르헨티나어를 가르치고해서 붙여진 이름)집에 아빠가 드나든다는 친구들의 말에 나는 그곳을 찾아 간다. 정돈되지 않고 이상한 냄새가 나는 듯 한 그곳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곳에서 아빠를 만나고 아빠와 나리 사이에 사내아이가 태어나고 나리는 몇년 후에 죽는다. 나는 선입견으로 그녀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그녀가 맘에 들었다. 그리고 남동생을 정성껏 키운다.
아르헨티나의 할머니가 상징하는 것은 외적인 면에 대한 편견을 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가족애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아르헨티나 할머니에게 건물이 있다는 것은 찻잔으로 부터 알 수 있다. 근검 절약의 중요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슬픔과 그리움보다 즐거웠던 일들이 무수히 되살아나고, 아무리 복잡한 길거리에서도 그날의 날씨에 상관없이 신선한 공기가 싸하게 가슴으로 흘러 들어온다. 마치 기적처럼.'
- 24p -
이곳에 있음이 신비스럽고 안에 쌓여있던 모든 것이 말끔히게 씻어내 준다. 그리움이란 모든 것이 달라진 후에야 비로소 싹트는 것이리라.
우리는 언젠가 공상에 젖어 있다가 애처롭게 깨서나도 혼자가 아닐 수 있다. 다른 생각으로 옮겨 갈 때까지, 차분하게 아픔을 견딜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이해하고 적응하며 사는 동물이다. 더불어 사는 사회는 아름다운 조직이다.
10대 시절에 석공인 친구 아버님과 함께 축대 쌓는 일을 한 적이 있다. 불행히도 그 친구 아버님께서 55세의 나이에 간암(매일 과음)으로 돌아가셨다. 그 친구를 지금도 2개월 마다 만나고 있다. 나도 석공이고 조각가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