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벅 '대지'
펄벅 '대지'
왕룽


선교사의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살면서 중국의 변화와 혁신 그리고 광대한 땅에 대한 펄벅의 장엄하고 셈세한 필체로 그려낸 3대에 걸친 왕룽 가족의 희노애락에 대한 <대지>로 1931년 퓰리처상, 1938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생활을 하며 지독한 향수병에 시달린 계기는 고향의 흙내음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었는데, <대지>를 읽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매일 나를 괴롭혔다. 한 권의 책이 사람의 인생을 바꾼다고 했다. 매일 북한산에 올라 고향을 바라보며 한숨짓고 매일밤 울어대는 소쩍새에 심장은 찢어지고 눈물은 베개를 적혀 나는 시름 시름 앓고 있었다.
농민(지금도 중국은 농민이라고 부른다)인 왕룽은 넘어지고 쓰러져도 다시 돌아와 대지를 품는다. 변화의 시기에 걸인 생활조차 꺼리지 않았지만 아이들에게 "빌어먹을 지언정 훔치는 것은 먹을 수 없다. 그리고 대지는 우리들의 어머니다." 왕룽의 아내가 병들어 간호할 때 부엌에 들어가서 여자들의 생활의 전부였던 그곳을 둘러보고 회한을 한다.
전 3부작으로 구성된 대하소설 <대지>는 가난한 소작농인 왕룽은 어느 부자집 종인 오란을 아내로 맞이해서 아이들을 낳고 땅을 사고 그리고 격변기에 피난가기도 했으며, 혁명기 시대에 보석과 귀금속으로 땅을 사고 지주로 살지만 렌화라는 첩을 들이고 오란의 심장은 무너지고 울분을 토하며 딸에게는 전족을 차게하고 자기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한다.
오란이 죽고 왕룽이 죽어 세 아들은 그의 재산을 물려받고 큰 아들 왕이는 난봉꾼이 되고 둘째 왕얼은 상인으로 큰 돈을 벌지만 냉정하고 인정이 없으며 셋째 왕싼은 군벌의 장군이 된다. 자식들은 부모의 뜻대로 되기 힘들다는 사실을 펄벅은 명백하게 보여 주고 있다. 왕룽의 비정상적인 딸을 통해 펄벅은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이 소설에 쏟아붓고 있다. 사실, 펄벅의 딸은 정신박약자로 태어나서 펄벅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 계기는 딸을 요양원에 보내기 위함이다. 펄벅의 <자라지 않은 아이>에 딸에 대한 고달픈 삶을 그려내고 있다.
3부에서 왕룽의 손주들은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오지만 미국이라는 나라도 허울좋은 껍대기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미국도 빈민과 죄악이 판을 치고 있고 위선과 폭력이 난무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맹자가 설파한 이상국가,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존재할 수 있는가. 맑은 물에 고기가 살 수 없는 것처럼 유토피아는 실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페스트나 코로나에 대한 면역체계를 찾아야 하는 우리는 지구상 어딘가에 분명히 숨겨져있는 그것을 찾아야 한다. 왕룽이 삶의 진실은 대지에 있다고 확신했던 것처럼.
나는 책을 여러 번 읽는 편이다. - 한번에 여러 번이 아니라 몇 개월 또는 몇년 후에 - 대지를 거의 50여년 만에 다시 읽은 이유는 사춘기의 아픔과 향수병에 또 다시 무너질까봐서 이제야 읽는다. 그 때 삼중당 문고 포켓판으로 걸어다니며 읽었던 그 재미를 생각하며 나는 지금도 걸어다니며 책을 읽고 있다. 도스트예프스키의 <죄와 벌>, 톨스토이의 <부활>등을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산동네에서 벗어나 주택가 가로등 밑에서 읽다가 방범대원에 끌려갔던 웃픈 사건도 있었다. 그때가 그립다.